이 책의 대부분을 나는 전철 안에서, 그리고 사이클머신 위에서 읽었다.
책이라는 물건은 도저히 걸으면서는 읽을 수는 없는데, 대신 기구를 이용하면 이동중에도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매일 회사로 나를 데려다 놓는 출근길 안에서 나는 지하철 바깥을 회상하며 이 책을 읽었다.
지하철 바깥의 세계는 박사논문을 졸업하기 전까지 나의 놀이터였다.
하루는 영등포로, 하루는 이태원으로, 하루는 삼청동으로, 다른 하루는 현충원 뒷길로 산책을 다니며 박사논문을 어떻게 준비할지, 남은 인생은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내 자신 안으로 파고들기 위해서 걸었다.
그러다보니 정작 장소에 대해서 눈을 뜬 것은 나중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걸을 때 내 관심사는 내 내면에 있다. 장소는 그 다음이다.
출근하고 나서 처음으로 새벽 등반길에 올랐다.
30분도 지나지 않아, 나는 이 등반길에서 전혀 흥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운동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러닝머신을 뛰지?'
'예전에 나는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역시 산책이란 한가했던 날의 방증이란 말인가?'
결국 나는 30분도 지나지 않아서 걸음을 돌려 돌아왔다. 그 날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다.
'서울의 일상.그리고.역사를 걷다'는 부제가 달려있는 '권기봉의 도시산책'이라는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물론 작가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이만한 퀄러티의 답사서(?)를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신택리지를 쓴 신정일 선생님, 역사지리학 관점에서 꾸준히 책을 내오고 있는 이현군 박사, 그리고 권기봉 선생님 정도가 떠오른다. '질러 유라시아'를 쓴 김모 선생도 있지만 요즘 글을 안 쓰기 때문에 패쓰.
권기봉 작가는 서울대 지구교육학과 98학번으로 답사여행 분야의 전문가이다. 내가 그를 처음본 것이 TV이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낄지도 모른다. 해외 곳곳을 다니며 그 나라의 간략한 역사와 풍습 등을 멋진 보이스로 설명해주던 그 사람이 '다시 서울을 걷다'와 같은 책을 쓴 것은 더 의외였다.
'다시 서울을 걷다'는 책은 그 근방에 내가 읽었던 책 중에서 드물게 돈이 아깝지 않았던 책이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그 책 서평을 내라고 했을 정도로 믿음이 가는 책이다. 물론 그 나름대로 아프게 꼬집어내야할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나친 역사의식, 정의감, 일관적 프레임 등.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곳에 작가가 데려다 준다는 것만으로도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편안함을 느낀다는 이유만으로 책을 읽지는 않는다. 적절히 책이 예뻐야 하고, 닿는 곳에 있어야 하며, 어느 순간에 저자에 대한 공감을 느껴야 하고, 더 중요한 것은 저자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아야 한다.
이 기준으로 볼 때 '권기봉의 도시산책'을 읽고 나는 다음에 권기봉 선생님이 내는 책도 사서 보기로 했다. 그의 글은 읽을 가치가 있다.
내가, 어쨌든(나는 어쨌든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 이유는 어쨌든은 어쨌든 결과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좋은 대학에서 지리학으로 박사까지 받은 사람인데, 게다가 나도 걷기 여행 만만찮게 해본 사람인데, 이 책에는 내가 몰랐던 보물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건 이 책이 답사로 쓰여진 책으로 가장하고 있지만, 실은 '공부'로 쓰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답사를 해도 '비원'(祕苑)이 일제가 만든 말이 아니라는 사실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건 진득하게 앉아서 사료를 펼치고 읽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저자의 가장 중요한 솜씨는 현대인들이 지루하지 않을만한 적당한 길이로 아티클을 만들어서 읽어내게 한다는 점이다. 단행본 책을 세번째 내는 저자다운 솜씨다. '다시 서울을 걷다'보다 더 아티클의 길이가 더 짧아졌다. 이렇게까지 짧아지니 나처럼 글을 업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약간 심심하다는 느낌을 준다. 평소 읽는 글의 길이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보통 사람들이 글을 읽으면서 점점 지루해하는동안, 나는 점점 긴 글을 읽어야 안 지루해지는 사람으로 변모해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책의 내용이 아닌 소위 수박 겉핥기식 코멘트들을 남겼다. 일단, 내용보다 이 책은 기획이나, 저자의 노력, 그리고 모든 점에서 높은 점수를 보고 싶다는 점을 분명히 전제해둔다. 그런 전제를 놔두고 내용과 콘텐츠로 이 책에 대해서 평가하라면, 아무도 그런 사람은 없지만, 딱 두 문장을 남기고 싶다.
1. 진화했다.
2. 여전히 정의롭다.
진화했다는 문장은 이전의 내 설명만으로도 충분히 독자를 납득시켰다고 본다. 더 현대인들의 구미에 맞게 답답한 지하철 바깥의 세상을 답사뿐만 아니라 공부를 바탕으로 하여 우리에게 전달해주었다는 차원에서 이 책은 진화했다.
그러나 2.는 여전히 불편하다. 저자가 집요하게 파고드는 문제는 결국 일제시대와 독재이다. 그러니까 좀 심하게 말하면 이 책은 답사서를 가장한 정치서라고도 읽힌다. 다루는 것은 공간이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일제시대의 잔혹함, 그리고 그것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위정자의 무능함이라고 읽힌다. 친일 건축가의 작품들을 집요하게 쫓아가서 '우리가 알고 있는 머시기는 친일파 작품이다'라고 폭로하고 싶은 것이다.
이 책은 마지막에 하비식으로 말하자면, '희망의 공간'을 다루면서 끝마치고 있다. 그러나 이 책 자체가 일제와 독재라는 거대한 트라우마가 공간에 어떻게 새겨졌는지에 대한 기록만 잔뜩 들어있다. 아니, 적어도 내 머릿속에는 저자가 그런 작업을 집요하게 펼쳐나갔다는 점만 기억에 남아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직할 것이다.
오히려 짧은 아티클 형식으로 글을 모아둔 것이 저자의 원래 생각을 포장하기 위한 의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저자의 진정성으로 볼 때 그 정도까지 일종의 '꽁수'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결국 시점의 일관성이다.
시점의 일관성으로 인해 1/3이 넘어가는 지점부터 사실, 이 책에 대한 흥미가 급격히 떨어졌다. 다음 나올 내용의 공간은 모르지만, 다음 나올 내용의 논지는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랬다.
논지의 참신성, 시각의 중요성에 대한 집요한 집착, 그리고 새로운 것이 아니면 엄청나게 지루함을 빨리 느끼는 나의 성향 때문일 것이다.
그 성향 때문에 나는 이 책에서 극도의 피로감을 느꼈다. 논지를 알면서도 계속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끝까지 읽지 않으면 끝까지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 논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누가 말할 때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읽어야만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저자는 독자에게 답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분명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정리하자면, 문제의 참신성 측면에서 그 질문들은 '낡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이 말은 '낡은' 문제의식으로 누군가는 끊임없이 공간계획에서 잔소리를 해줘야 한다는 전제를 담고 있다.
# 나가면서
나는 권기봉 선생님과 같은 작가가 더 잘 되기를 바란다. CF에 나와서 돈도 일년에 몇십억씩 벌고, 나중에 권기봉이 되겠다고 하는 후학을 교육시키는 연예기획사 같은 것도 만들었으면 좋겠다. 아무렴 우리나라에 예쁘고 춤 잘추는 사람들이 k-pop 열풍을 만들었듯이 한국발 걷기와 책쓰기 열풍이 전 세계를 강타하지 못하란 법이 어디 있으랴 싶다.
그 와중에서 나는 그의 책이 '새로워졌는지'를 물을 것이다. 나에게 별다른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그의 책을 두 권씩이나 사서 본 독자의 입장에서 드는 생각일 뿐이다. '새로워져야 한다'는 주문은 나 같은 사람의 기대는 확실히 충족시킬 것이다.
어쩌면 또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질러 유라시아 2'를 냈으면 어땠을까? 책으로 먹고 살려면 아무리 못해도 책 10권은 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아직 나도 블로그에 글을 끄적일 정도로 밖에 시장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글쟁이이지만, 그는 분명히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시장에서 어떤 작가를 인정하기 전까지 작가는 진정한 자기 목소리에만 귀기울이기 어려울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서태지가 처음에 '난 알아요'가 아닌 '울트라 맨이야'를 들고 나왔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까?(나는 기가 막힌 사례라고 생각하지만, 누군가는 '도대체 언젯적 얘기야?'라고 할 사람이 대다수인 것인가?)
'권기봉'이 브랜드가 되는 순간 그는 오히려 더욱 그의 메시지에 의해서 평가될 것이다. 지금과 같은 훌륭한 답사연구가라는 수식이 없어지고 메시지만 남아있을때도 그의 책이 살아남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일독을 권하지는 않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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