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한 세상이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드는데, 책을 쓰는 사람들은 많아진다. 여행기를 사서 읽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드는데, 여행기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아진다.
출판업계에서 흔하게 듣는 말이 '여행기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럴 수록 직장을 때려치우고 세계일주한 원고를 가져온 사람들은 점점 늘어난다고 한다.
책뿐만이 아니다. 블로그로 가면 더 골치아프다. 대한민국 백령도에서 마라도까지 여행기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돈이 되든 안되든 여행기를 쓰는 것은 취미라고 하기도 어렵고, 이제 일상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정도로 여행기가 포화라면, 우리는 인터넷만 접속하면 대리여행을 즐길 정도로, 혹은 서점에서 만족스러운 여행기를 한아름 안고 올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여행기가 있는가? 많은 여행기가 있다고 해서 좋은 여행기가 충분히 많은 것은 아니다. 싸잡아서 뭐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한비야 이후로, 여행기는 냉정하게 말하면, 너무 많이 나왔고, 나오지 말았어야 할 여행기도 많았다.
각설하고,
여행기를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아직 모를 독자분들을 위해서 내가 "질러, 유라시아!"라는 책의 저자임을 먼저 밝혀야 하겠다. 나는 2005년 12월 중국 텐진에서 시작해 2006년 7월 파리까지 7개월을 여행하고 돌아와서 여행기를 쓴 바 있다. 그 책이 바로
"질러, 유라시아"
그 때도 이미 여행기는 포화상태였고, 내가 여행기를 내달라고 하는 출판사마저 빠꾸를 먹었다. 여행기를 내게 된 것은 내가 박사과정씩이나 되어서 다시 전체적으로 여행기를 한번 손보고, 또 교수님의 소개로 출판사를 소개받은 뒤였다. 어쨌든 여행 5년만에 2011년 11월 나는 드디어 "질러, 유라시아!"를 내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이 책으로 큰 돈을 벌거나 큰 유명세를 탄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 경험으로 여행기를 쓰는데 필요한 나만의 생각들을 공유해보고자 한다.
# 주의: 이 조언들은 극히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맞지는 않을 수 있다.
1. 여행하고 여행기를 쓰지 말고, 여행기를 쓰기 위해서 여행해라.
처음 나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기 보다 여행기를 쓰고 싶었다. 여행을 내가 책을 쓸 수 있도록 하는 도구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래서 처음에는 여행 자체의 매력에 깊이 빠지지 못했던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런 단점이 있었다 하더라도 매일 내가 여행지에서 글을 쓰지 않았다면 '질러 유라시아'는 절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매일 썼다. 추운 호텔방에서 손을 호호 불어가며, 더운 호텔방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매일 썼다. 원고의 수준이 높든, 낮든 그 때 초고 몇 백 페이지가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편집으로 날려버리고도 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여행을 즐기고 여행기를 나중에 쓰라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여행기를 쓰려고 하는 여행과 여행기를 생각하지 않는 여행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여행기를 쓰려면 작은 정보부터 큰 정보까지 모두 기록해두어야 한다. 사진도 가급적 여러 각도에서 여러 장 찍어두어야 하고, 파일도 가지런히 정리해두어야 한다. 요즘은 이 모든 것이 매우 수월해졌지만, 여행을 하는 7개월 내내 이것들을 관리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여행기를 쓰려면, 여행기를 쓸 수 있는 여행을 해야 한다. 기록하고, 맛보고, 또 기록하고, 돌아다니고, 또 기록하기를 반복해야 여행기를 쓸 수 있다.
여행기를 준비하는 사람에게 이것이 가장 중요한 조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행기를 쓸수 있는 여행을 해야 한다.
2. 솔직하게, 또 솔직하게.
내가 시중에 나오는 많은 여행기와 '질러 유라시아'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지점이 있다. 시중의 많은 여행기는 여행의 로망을 부각한다. 어느 지방 사람을 만났는데 무지 착하고 순수해서 우리가 얼마나 때묻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는 식의 여행기가 많다. 류시화의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이 대표적이다. 류시화의 눈에 비친 인도인들은 다 어디 있는지 모를 일이다.
'질러 유라시아'에는 여행이 지루하다는 이야기가 꽤 많이 나온다. 여행이 별거 없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질러 유라시아'에 대해서 많은 비평을 받은 것은 아닌데, 비평에서 좋은 이야기를 한 사람들은 꼭 찍어서 그 부분을 좋다고 했다. 여행기 중에서 여행이 '재미없다'고 쓴 여행기는 흔치 않다는 것이다.
어쩌면 여행을 했는데 그 지역 사람들이 순수하더라 하는 많은 이야기들은 이미 다른 작가들이 충분히 써 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행기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자기만의 독특성(originality)일 것이다.
그 힘은 결국 솔직함에서 온다. 나는 '여행이 지루하다'는 표현에서 의외로 독자들의 공감을 얻은 것을 보고 이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작은 여행이라도 꼭 내 자신에게 묻곤 한다.
정말로 내가 이 여행을 느낀 것이 무엇이었나?
최근에도 예산, 홍성, 충주, 서산, 용인 등의 도시에 잠깐씩 짧은 여행을 다녀왔는데, 각각의 느낌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기억하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정말로 내가 이 여행에서 느낀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묻는 습관 때문일지도 모른다.
3. 캐릭터를 부각하라.
"질러 유라시아"를 쓸 때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다. 내가 좀 더 과감한 사람이었더라면, 나는 여행기를 훨씬 더 잘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원본이 좀 나았던 점도 있었다.
원본에는 내가 여행에서 만난 수많은 캐릭터들의 심리와 갈등, 그리고 로멘스 등이 상당히 구구절절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누구와 누가 어디에서 사귀고, 어떻게 싸웠으며, 나중에 기가 막히게 다시 만나게 되었다든지, 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런 이야기들이 훨씬 이야기를 맛깔나게 해주었고, 아마 그 이야기가 모두 포함되었다면 '질러 유라시아'는 훨씬 흥미로웠을 것이다.
그런데, 여행을 끝낸지 한참이 지난 그 때 당사자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그 여행에서 만난 어떤 커플은 결혼 직전까지 갔다가 비극적으로 헤어지는 일도 있었다.
차마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쓸 수는 없었다.
더 재밌게 쓰기 위해서 캐릭터를 부각시켰으면, 장담하건대 원고는 훨씬 나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름의 윤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그들의 이야기를 편집했고, 편집한 만큼 원고는 더 재미 없어졌다.
장소보다는 캐릭터가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든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장소에 대해서 이태백 아니라 이태백 할아버지가 와서 글을 써도 그건 카메라를 이길 수 없고, 카메라는 현장에서 본 것을 이길 수 없다. 글을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장소가 아닌 사람이다.
사람의 이야기가 주가 되게 하고, 장소는 배경이 되게 하라. 그러면 여행기는 훨씬 흥미진진해질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면 개나 고양이 등 동물의 행동에 포커스를 맞춰 쓰는 것도 흥미로울 수 있다.
4. 독자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를 생각하라.
여행기가 아니라 거의 모든 글에 해당하는 조언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 여행기 작가들은 독자가 무엇을 아는지 고려하지 않는다. 초보 여행기 작가가 실수하는 것중에 하나는 고유명사를 처음에 잔뜩 써놓는 것이다. 고유명사를 많이 쓰면 글이 재미 없어진다. 참고로 나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좋아하지 않는데, 신들 이름이 너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항상 글은 남이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터키에 대해 쓴다면,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 성당이나 블루모스크에 대해서 쓰기 보다는 케밥에서부터 쓴다. 혹은 이태원에서 많이 파는 쫀득쫀득한 터키아이스크림에 대해서 쓰거나, 2002년 월드컵에서 3, 4위전의 주인공이 터키였다는 사실, 혹은 6.25때 터키사람이 몇 명이 참전했다는 사실 등을 떠올리면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먼저 아는 사실로 독자를 유인해서, 모르는 사실로 데려간다.
어떤 글들은 순서만 바꿔도 훨씬 훌륭해질 수 있다. 글의 순서를 정하는 가장 큰 규칙은 아는 데에서 출발해서 모르는 데로 데려가는 것이다.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독자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아야 한다.
역설적으로 여행기는 자기가 여행한 장소보다는 독자들이 그 여행장소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알아야 잘 쓸 수 있다.
# 일단 오늘의 팁은 여기까지.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쓰겠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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