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7일 금요일

칸트는 말 그대로 철학적 수준에서 시간과 공간을 인식의 조건이라고 했는데, 데카르트는 어쨌든 공간을 수학적 평면 속에 가둬두었고, 그것은 아날로그 공간을 디지털적으로 사고하는 초석이 되었다. 뉴턴은 시간과 공간에 산식을 부여하여 공간에 절대법칙과 같은 것이 존재함을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데카르트적 절대공간은 뉴턴에 와서야 현실이 된다고도 할 수 있겠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은 시간의 속도 역시 처한 위치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이것이야 말로 메타포로만 존재하던 상대공간의 과학적 발견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정작 궁금한 것은 이러한 과학에서 바라보는 공간에 관한 관점이 진화하는 것이 지리학의 발전과 상관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러프하게 서로 공간에 대한 지평이 넓어지면서, 인간은 자신의 위치성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었다는 식의 입에 발린 소리 말고 진짜로 지리학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내 생각에 도움이 안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교통모형 등에서 중력모형을 이리저리 활용해서 쓰고 있는 것은 알고 있다. 그렇다면 특수상대성 이론의 공식 역시 교통모형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진짜 말 그대로 공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물리학이 큰 도움을 줬다기 보다 복잡다양한 인간세상의 어떤 부분을 부각하기 위해서 그 물리법칙을 가져다 썼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일까? 만약 힉스입자의 존재가 증명되어 상대성 이론의 전제가 뒤집혔다 한들 그것은 지리와 공간의 일반적인 이해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반전의 계기를 마련할까. 물론 칼세이건의 말처럼 우리는 코스모스의 일부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상대성과 맥락성이 중요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상대성 이론씩이나 증명되어야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대략 중학생 정도의 나이만 되어도 누군가의 시간은 천천히 가고 누군가에게는 빨리 가며, 누군가에게는 좁은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넓은 공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행을 한 번 해본 사람은 세상이 얼마나 넓은 줄을 알게 되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도 그곳의 공간과 시간은 다르게 흐를 것이라고 대강 알게 된다. 그렇다면 진지하게 절대공간론과 상대공간론은 대립해본 적이 있기나 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재미있는 점은 분명히 공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바뀌어 왔다는 것이다. 그 변형의 일부는 경제변동이나 사회변동과 같은 인문환경의 변화에 기인할 것이다. 우리는 종종 자연과학적 배경을 인문사회적 환경의 변화와 연결지어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 사람들은 한번도 데카르트의 절대 공간에 갇혀있었던 적도 없고, 흄처럼 인간의 인식의 지평이 감각정보에만 국한되었다고 생각한 적도 없으며, 그렇다고 완전한 상대적 공간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고 느낀 적도 그렇게 주장한 적도 없다. 그렇게 치열하게 사고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때나 지금이나 공간은 상대성과 절대성이 공존하는 생활의 일부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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