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4일 금요일

On the tragedy of geography (1)

I cannot talk about my life without geography. Officially, I have a PhD degree of geography, which is rarely found in Korea. Compared by other disciplines, not many people intend to know about what geographers do in practice. In fact, they do hardly know the existence of geographers; but they do exist. I am one of the evidences.

The question that Korean geographer should meet many times is "why you chose the discipline?". That is not an easy question. However, we geographers are prepared to answer the question because we are too often questioned. One of my prepared answer is "dependent on the cut-line of entrance examination". It is, of course, not true, but rather convenient because people are not supposed to ask more when I answered like that. 

In general, Korean are clearly aware of how important cut-line is in the entrance exam. I believe that the question is another version of the other question;
what the hell are you geographers do?

In fact, I do not know. Even though I can be classified as a geographer, my job is rather irrelevant to geography. In fact, there are few jobs that are clearly separated from geography as most of the tasks human-beings do is done on the geography.

In some aspects, all of the human activities are relevant to geography; even the history of mathematics is closely related to geography. Think of who was the first person to measure the circumference of the earth, Eratosthenes, who is also clarified as a geographer. 

Maybe people who are asking about geography want to know what the original role of geographers is in this society. For example, people are usually aware of the role of historian, which investigate the fact and context of the historical events and provide us lessons from it. It is really clear; but how about geography? If you as a geographers gather the geographical information on different places, what are those for? Even for me, it is not an easy question. 

I believe this ambiguity directly leads to the decreased role of geographers in Korea. Even though there are many adjacent disciplines like urban planning, meteorology, geology, their role is not as vague as geographers. It can be called as the tragedy of geography. Geography deals with almost everything in the world, but none of them is so specialized. 

This essay is one of the attempts to illuminate the identity of geography in Korea. While I have studies geography for a long time, no clear answer was obtained. For me, it is still difficult to find its own role in geography. I believe the lack of investigation on this question is closely related to the decreased role of geography in Korea. I am not sure if the concentration of identity would contribute to animate geography. However, I am trying to write something on the experiences and thoughts while studying geography in Korea.

I am not sure of how much these essays can improve the circumstance in which Korean young geographers face. However, this work would be helpful for understanding why geographers are not having their own role in the Korean society. 

To be continued. 




2015년 12월 28일 월요일

목적을 찾으면 신을 찾게 된다

원글주소: https://brunch.co.kr/@skytreesea/11

글, 영화, 책상, 휴대폰의 공통점. (스압주의)
노동의 산물, 누군가는 이것들을 만들어야만 한다.
누군가 나에게 취미가 뭐냐고 물어서 생각해봤다.
가장  재밌는 것이 뭘까.
만드는 거다.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만큼 사람을 흥분시키는 일은 없다.
다 끝났을 때는 자신이 만든 세계를 보면서 만족감을 느낀다.
이런 기쁨을 느끼기 위해,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고,
책상을 만들고,
휴대폰을 만든다.
아니,
만들다보면 만드는 사람만 느끼는 특별한 기쁨을 느낀다.
기쁨은 사후적이다.
그런데 이 기쁨은 어디에서 왔을까.
세상을 만든 신이 있다면,
인간이 신을 닮아서가 아닌가 싶다.
만약 신이 있다면,
그는
태양과,
지구와,
산소와,
숨쉬는 단백질 덩어리인 생명체,
급기야
자기를 닮은 인간을 만드는데 성공했을 것이다.
아마도 인간은 신의 모사품이었을 것이다.
만든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복제하는 행위이다.
영화는 자기 머릿 속의 상상을 현실에 복제하는 행위,
아마 워쇼스키 남매가 매트릭스를 만든 것처럼,
신도 자신을 보면서 인간을 빚었을 것이다.
확률적으로 그게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다.
그렇다면 신은 완전할 수 있을까?
돌덩어리에 불과한 지구에
적절한 정도의 중력과,
적절한 농도의 산소와,
적절한 수준의 물과,
적절한 수준의 화석연료를 주입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수 차례, 아니 수만 차례, 아니 수조 차례의
오류와 고치기를 통해서 가능했을 것이다.
신이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면,
그는 전지전능한 무엇이기보다,
집요한 인내심의 소유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신은,
자신의 모사품을 만들기 위해 아마 여러 차례 실험을 거쳤을 것이다.
별을 만들고,
인력의 법칙으로 행성을 돌리고,
생물체가 타 죽지 않을 정도로,
또 생물체가 얼어 죽지 않을 정도로,
우리가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사랑하다가 죽어서
썩어서,
다시
미생물의 먹이가 되어 태어날 수 있을 땅 속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그는
수차례 실험을 거쳤을 것이다.
밤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은 아마도
신이 인간과 비슷한 것을 만들다 실패한 흔적일 지 모른다.
신을 닮은 인간은,
또 무엇을 만들면서 흥미를 느낀다.
만듦의 가장 기본적 요소는
아이디어와 물질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말하는 이데아(idea)가 설계도라면,
질량을 가진 물질은 이데아를 실현하는 도구이다.
인간의 노동과,
꿀벌의 노동이 다르다고 한
마르크스의 주장은 바로 이런 점을 착안한다.
말하자면,
꿀벌은 살려고 만든다.
인간은 이데아를 모방한다.
인간이 이데아를 모방한다는 속성은
마르크스에 의해서 극복되었다기 보다는
강화되었다.
자,
신의 존재를 제거하고 설명해보자.
어쩌다보니,
저 별들과,
하늘과,
물과,
바람과,
미생물과,
인간이 만들어졌다.
어쩌다보니,
진화의 과정을 통해 인간이 생겨났고,
이 모든 것이
어쩌다보니 생겨났다.
그런 인간은
어쩌다보니
자연만물이 생긴 것과 똑같은 원리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고,
만듦을 좋아한다는 변태적 특성으로
지구상의 문명을 건설했다.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다리를 놓고,
빌딩을 놓고,
자동차를 만든다.
신이 없으면 인간의 존재는 설명할 수 있지만,
다른 수 많은 별들의 존재가 설명되지 않는다.
매트릭스는 묻고 있다.
왜 너는 거기에 있느냐?
네가 여기 온 목적은 무엇이냐?
목적을 찾는 자는 결국
신을 찾게 되어 있다.
그 신은 전지전능한 초능력자이기 보다는
아주 부지런하고 포기를 모르는,
집요한,
인간을 닮은,
만드는 것을 무지 좋아하는,
어떤 존재일 것이다.

2015년 12월 15일 화요일

국제유가 130 달러의 추억


2008년 국제유가는 두바이유 기준으로 배럴당 130달러까지 치솟았다. 같은 해 경제위기가 닥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국제유가는 20달러선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올랐다. 

내가 석사 논문을 쓴 시점은 2009년이었다. 나는 국제유가가 300달러가 될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보았다. 물론 휘발유가격은 국제유가보다는 싱가포르 석유현물시장에 의해서 더 좌지우지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국제유가의 흐름과 연동된다. 

국제유가가 300달러가 되면 크리스탈러, 베버, 튀넨, 알론소 등이 말한 거리조락 곡선의 기울기의 절대값이 커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알론소의 주거입지 이론처럼 기울기가 커진 상황에서 가난한 사람은 도심부에 입지하고, 부자들은 외곽으로 밀려나가는 역전현상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당시 강남 아파트 가격을 조사하면서 이와 같은 특성이 일부 VAR 모형으로 증명되었고, 나는 그 사실을 논문으로 썼다. 지금도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내 예상과 달리 유가는 셰일혁명 등으로 연일 하락하고 있다. 말 그대로 '거리비용'은 낮아지고 있는 셈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왜 그렇게 잘못된 예측, 즉 유가가 300달러까지 오를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를 생각해봤다. 아직도 기억나는데 90년 초등학교 3학년때 에너지 교육을 받으면서 석유가 35년치 밖에 남지 않았다는 통계를 분명히 본 적이 있다. 그로부터 19년이 흘렀으니 이제 석유는 16년어치 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내 무의식이 계산했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내 논문은 변변한 학술지에 발표도 안 하고 그냥 묻혔다. 원유가격의 비대칭성에 대한 가설도 깨졌다. 허술한 점이 많지만, 나는 덕분에 시계열 그래프를 보는 눈을 배웠고, 엑셀로 빅데이터까지는 아니고 그냥 데이터를 이렇게 저렇게 가공하는 법을 배웠다. 데이터와 친해질 수 있다는 점은 내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었다. 

2009년,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공부를 많이 한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가끔 누가 내 석사논문 보여달라고 하면 그냥 보여주는데, "지리학과에서 가르쳐주지도 않는 계량기법을 어떻게 다 배워서 썼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독학(獨學)하고 독학(毒學)했다. 2009년 5월은 그렇게 뜨거웠다. 


2015년 11월 8일 일요일

어쩌다 시는 이렇게 찬밥신세가 되었을까?

김사인의 시시한 다방을 듣다가, 문득 시라는 것이 다시 읽고 싶어서 서점에서 몇 권을 집어들어 사서 돌아왔다. 분명, 나는 학교다닐 때 윤동주, 김소월, 김수영, 백석, 정지용, 서정주, 박목월 등의 시인의 시를 읽으며 가슴이 뛰었던 적이 있으며, 내가 산 시집 중 한 두 편 정도는 그런 감동을 나에게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몇 편을 소리내어 읽어본 이후 나는 그런 기대를 대부분 접었다(어떤 시집인지를 알려주면 더 좋겠지만, 차마 그렇게는 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최근 발간된 시집이다).

대한민국의 평균정도의 지성을 가진 사람의 눈으로 봤을 때, 대부분 시는 공감은 커녕, 다 읽어도 그게 무슨 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한편 두편 세편을 읽어도 똑같았다. 지금은 사용조차 하지 않는 생뚱한 단어들은 기본이며, 다 읽어도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무엇을 떠올리라는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먹고 살기 힘들어 시적 감수성이 바닥난 것인가? 어쩌면 가장 쉬운 비판은 나를 향하는 것이다. 가슴이 메말라서, 시적 감수성이 떨어져서 그럴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나는 문득 내가 왜 시를 읽지 않게 되었는지를 떠올렸다. 스물 몇살 즈음에 같은 이유로 시집을 몇 권 샀다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왜 나는 돈주고 시집을 사서 이렇게 고생하는지 한탄하다가 시를 읽기 그만두었던 것이었다. 거의 데자뷰같은 이 현상을 보면서, 문제가 나뿐만 아니라 어떤 시인들에게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정직해지자. 이건 궁극적으로 한국문학, 그리고 문학판의 문제라고 판단됐다. '이상한 시'를 양산하는 한국의 문학에 일부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도 이상한 시들의 난립을 이상한 시들의 난립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 아무도 벌거숭이 임금님을 벌거숭이 임금님이라고 못 하는 격이다.

어쩌면 시인들이 다 굶도록 시집 몇 권 사지 않은 나의 잘못일수도 있겠다. 그러나 다른 장르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뺏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에 비하면, 내가 읽었던 시들은 너무 안온한 자기만의 폐쇄적인 세계에 빠져있었다. 신기한 게 한결같이 그랬다. 게다가 평론가들의 평론은 더 어렵다.

한 나라의 한 문학 장르를, 특정한 작품을 언급하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비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마는, 나는 좀 슬픈 생각이 들었다. 한 때 내가 좋아했던 문학장르였던 '시'가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글들로 가득차있는 이상한 장르가 되어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시인들이 힘든 시대이긴 하다. 나는 오히려 거꾸로가 진실이 아닌가 싶다. 시가 시시해져서 시시한 대접을 받는건 아닐까 싶다.

설마 시가 이렇게 된 것이 이름도 비슷한 시~~인자유주의 때문은 아닐테고.

2015년 9월 16일 수요일

파이썬 3.4 BeautifulSoup로 웹페이지 파싱(parsing)하기

파이썬 BeautifulSoup로 웹페이지 파싱(parsing)하기

# ==> 필요한 자료 텍스트 형태로 뽑아내기, 아주 아주 기초편

나는 프로가 아니다. 그런데 남이 써놓은 걸 따라하면 도저히 안된다. 그래서 내가 하나하나 깨달은 대로 적어보았다. 

# 오늘 할 일은 riss 에서 '발성'이라고 검색한 100편의 논문제목을 뽑아내는 일이다. 사실 이것은 시스템에서 그렇게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100편이 10000편이 되면 어떨까? 또 십만편의 논문 제목을 뽑을 일은 없을까.

# 숫자가 늘어날수록 사람 손은 기계를 이길 수 없다. 예전부터 논문 찾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실현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파싱이라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 파싱, 웹페이지에 있는 정보를 뽑아내는 일이다.

# url을 불러들이는 함수는 파이썬 3.4를 기준으로 urllib.request.urlopen이다. 그런데 매번 비슷한 함수를 쓰기 때문에 일단 앞 부분(urllib.request)를 ur로 불러들이기로 한다.

# 프로그래머들 사이에서는 이렇게 자의적으로 축약하는 것이 가독성을 해칠 수 있으므로 피하라고 한다. 참고.
import urllib.request as ur
# '''인터넷 페이지에서 정보를 뽑아내는 것을 파싱(parsing)이라고 한다. 그 짓을 하기 위해서는 페이지의 정보가 겉으로 보이는 그래픽 이면에 수많은 html 명령어로 이뤄져 있음을 먼저 인지해야 한다. urlopen으로 불러들이면 페이지의 html을 그대로 불러들인다. 이 형태는 읽기도 힘들고 의미를 뽑아내기도 힘들다 그래서 BeautifulSoup이라는 모듈을 이용한다. 모듈은 또 뭣인가. 말하자면 부가기능이라고 보면 된다. 아이폰에 수많은 앱이 있듯이 파이썬에 수많은 모듈이 있다. BeautifulSoup는 그 이름처럼 굉장히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유용한 모듈 이다.'''

from bs4 import BeautifulSoup as bs


# riss에서 '발성'으로 검색한 후 url 주소를 복사한다(ctr-c, ctr-v)
# url 객체에 저장한다. 꼭 객체로 저장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객체는 공짜니까 마음껏 만들어도 된다.

url='http://www.riss.kr/search/Search.do?detailSearch=false&viewYn=CL&query=%EB%B0%9C%EC%84%B1&queryText=&strQuery=%EB%B0%9C%EC%84%B1&iStartCount=0&iGroupView=5&icate=bib_t&colName=bib_t&exQuery=&pageScale=100&strSort=RANK&order=%2FDESC&onHanja=false&keywordOption=0&searchGubun=&p_year1=&p_year2=&dorg_storage=&mat_type=&mat_subtype=&fulltext_kind=&t_gubun=&learning_type=&language_code=&ccl_code=&language=&inside_outside=&fric_yn=&image_yn=&regnm=&gubun=&kdc=&resultSearch=false&listFlag=&keywordRecom=&keywordRecom='
r=ur.urlopen(url).read()

# 원래는 BeautifulSoup(r) 로 입력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편의를 위해서 글자수를 줄였다.
soup=bs(r)

# 이렇게 하면 r은 페이지의 html 이 저장되어 있고, soup는 html을 정보 빼내기 좋은 형태로 바꿔놓은 xml 형태의 새 객체가 된다. html 형태에서는 자료를 핸들링하기가 어렵지만 뷰티풀수프로 끓인 자료는 말 그대로 뷰티풀하게 자료를 빼낼 수 있다.

r
soup

# r과 soup를 각각 눌러봐서 도대체 이 파일들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비교해보자.

# 크롬 등 브라우져에서 F12를 누르면 복잡한 html 식이 간단하게 정리되어서 나온다. 예를 들어 이 홈페이지 내용에서 필요한 내용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ctr-f를 누르고 찾기를 원하는 단어를 눌러주면 된다. 예를 들면 나는 논문 목록이 있는 부분을 찾기 위해서 '합창음악'을 찾았다. 그러면 html 언어를 다 모른다 하더라도 대강 '합창음악'이 어떤 명령어들로 둘러쌓여 있는지는 알 수 있다.

# 합창음악은 'srList'라는 이름의 클래스(class)에 둘러쌓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도 수퍼초보이고 명령어도 하나도 모르지만, '합창음악의 효과적인'이라는 문구가 넓게는 <div class='srList'>에 속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물론 여러번의 삽질 끝에 일어난 일이다. 앞뒤 볼 것 없이 'div class='srList'에 있는 내용만 뽑아내서 객체에 저장해! 라는 문구는 아래와 같이 쓴다.

srlists=soup.find_all('div',{'class':'srList'})

# 문법을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문법은 굉장히 위계적으로 되어 있다. 위치를 지정하고, 상자를 지정하고, 모양을 지정하고, 그 뒤에 제목을 지정하는 식이다. 여기에서는 감으로 'label'에 내가 원하는 논문 제목정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riss창에 보면 '발성'이라는 단어가 진하게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strong>발성</strong> 으로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strong>으로 씌운 놈은 필경 두껍게 강조하라는 뜻일 것이다. 문법을 다 몰라도 대강 우리가 찾으려는 정보가 label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 label에 있는 텍스트만 뽑아내라는 명령을 수행해보고자 한다.





# 이미 우리는 srlists에서 전체 페이지 중 논문제목을 담고 있는 부분만 떼어내서 객체로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논문제목에 해당하는 놈만 뽑아내라는 명령을 내린다. srlists 안에 들어가서 label이라는 명령어가 붙어있는 놈을 꺼내라는 명령은 아래와 같다.
sr=srlists[0].find_all('label')

# 힘들게 뽑아냈으면, 한번 출력해봐야 한다.

for s in sr:
    print(s.text)

# 드디어 논문 제목이 출력되는 것을 볼 수 있다.

import codecs
# 그럼 이 파일을 현재 디렉토리에서 bs_test.txt라는 파일로 저장해보자.
f=codecs.open('bs_test.txt','w','utf-8')

# 귀찮으므로 그냥 따라한다.
for s in sr:
    f.write(s.text)
    f.write('\n')
f.close()


* 위 그림은 최종적으로 내가 뽑은 논문제목이 같은 폴더의 'bs_test.txt'라는 파일로 저장된 결과이다. 저기까지 꼬박 일박이일이 걸렸다. 이런 식으로 정보를 꺼내서 자르고 잘라 필요한 형태로 만들면 된다. 나도 안다. 아직 멀었다. 그러나 시작은 했다.

# 조만간 해당 주제로 논문을 자동을 찾아내고 초록도 긁어서 인용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주는 프로그램도 가능할 것이다. 


2015년 8월 7일 금요일

칸트는 말 그대로 철학적 수준에서 시간과 공간을 인식의 조건이라고 했는데, 데카르트는 어쨌든 공간을 수학적 평면 속에 가둬두었고, 그것은 아날로그 공간을 디지털적으로 사고하는 초석이 되었다. 뉴턴은 시간과 공간에 산식을 부여하여 공간에 절대법칙과 같은 것이 존재함을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데카르트적 절대공간은 뉴턴에 와서야 현실이 된다고도 할 수 있겠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은 시간의 속도 역시 처한 위치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이것이야 말로 메타포로만 존재하던 상대공간의 과학적 발견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정작 궁금한 것은 이러한 과학에서 바라보는 공간에 관한 관점이 진화하는 것이 지리학의 발전과 상관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러프하게 서로 공간에 대한 지평이 넓어지면서, 인간은 자신의 위치성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었다는 식의 입에 발린 소리 말고 진짜로 지리학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내 생각에 도움이 안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교통모형 등에서 중력모형을 이리저리 활용해서 쓰고 있는 것은 알고 있다. 그렇다면 특수상대성 이론의 공식 역시 교통모형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진짜 말 그대로 공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물리학이 큰 도움을 줬다기 보다 복잡다양한 인간세상의 어떤 부분을 부각하기 위해서 그 물리법칙을 가져다 썼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일까? 만약 힉스입자의 존재가 증명되어 상대성 이론의 전제가 뒤집혔다 한들 그것은 지리와 공간의 일반적인 이해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반전의 계기를 마련할까. 물론 칼세이건의 말처럼 우리는 코스모스의 일부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상대성과 맥락성이 중요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상대성 이론씩이나 증명되어야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대략 중학생 정도의 나이만 되어도 누군가의 시간은 천천히 가고 누군가에게는 빨리 가며, 누군가에게는 좁은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넓은 공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행을 한 번 해본 사람은 세상이 얼마나 넓은 줄을 알게 되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도 그곳의 공간과 시간은 다르게 흐를 것이라고 대강 알게 된다. 그렇다면 진지하게 절대공간론과 상대공간론은 대립해본 적이 있기나 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재미있는 점은 분명히 공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바뀌어 왔다는 것이다. 그 변형의 일부는 경제변동이나 사회변동과 같은 인문환경의 변화에 기인할 것이다. 우리는 종종 자연과학적 배경을 인문사회적 환경의 변화와 연결지어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 사람들은 한번도 데카르트의 절대 공간에 갇혀있었던 적도 없고, 흄처럼 인간의 인식의 지평이 감각정보에만 국한되었다고 생각한 적도 없으며, 그렇다고 완전한 상대적 공간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고 느낀 적도 그렇게 주장한 적도 없다. 그렇게 치열하게 사고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때나 지금이나 공간은 상대성과 절대성이 공존하는 생활의 일부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5년 5월 31일 일요일

여행기 2배 재미 있게 쓰는 방법


신기한 세상이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드는데, 책을 쓰는 사람들은 많아진다. 여행기를 사서 읽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드는데, 여행기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아진다.

출판업계에서 흔하게 듣는 말이 '여행기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럴 수록 직장을 때려치우고 세계일주한 원고를 가져온 사람들은 점점 늘어난다고 한다.

책뿐만이 아니다. 블로그로 가면 더 골치아프다. 대한민국 백령도에서 마라도까지 여행기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돈이 되든 안되든 여행기를 쓰는 것은 취미라고 하기도 어렵고, 이제 일상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정도로 여행기가 포화라면, 우리는 인터넷만 접속하면 대리여행을 즐길 정도로, 혹은 서점에서 만족스러운 여행기를 한아름 안고 올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여행기가 있는가? 많은 여행기가 있다고 해서 좋은 여행기가 충분히 많은 것은 아니다. 싸잡아서 뭐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한비야 이후로, 여행기는 냉정하게 말하면, 너무 많이 나왔고, 나오지 말았어야 할 여행기도 많았다.

각설하고,

여행기를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아직 모를 독자분들을 위해서 내가 "질러, 유라시아!"라는 책의 저자임을 먼저 밝혀야 하겠다. 나는 2005년 12월 중국 텐진에서 시작해 2006년 7월 파리까지 7개월을 여행하고 돌아와서 여행기를 쓴 바 있다. 그 책이 바로

"질러, 유라시아"

그 때도 이미 여행기는 포화상태였고, 내가 여행기를 내달라고 하는 출판사마저 빠꾸를 먹었다. 여행기를 내게 된 것은 내가 박사과정씩이나 되어서 다시 전체적으로 여행기를 한번 손보고, 또 교수님의 소개로 출판사를 소개받은 뒤였다. 어쨌든 여행 5년만에 2011년 11월 나는 드디어 "질러, 유라시아!"를 내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이 책으로 큰 돈을 벌거나 큰 유명세를 탄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 경험으로 여행기를 쓰는데 필요한 나만의 생각들을 공유해보고자 한다.

# 주의: 이 조언들은 극히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맞지는 않을 수 있다. 이대로 썼는데 재미 없었다고 말하면 곤란

1. 여행하고 여행기를 쓰지 말고, 여행기를 쓰기 위해서 여행해라. 

처음 나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기 보다 여행기를 쓰고 싶었다. 여행을 내가 책을 쓸 수 있도록 하는 도구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래서 처음에는 여행 자체의 매력에 깊이 빠지지 못했던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런 단점이 있었다 하더라도 매일 내가 여행지에서 글을 쓰지 않았다면 '질러 유라시아'는 절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매일 썼다. 추운 호텔방에서 손을 호호 불어가며, 더운 호텔방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매일 썼다. 원고의 수준이 높든, 낮든 그 때 초고 몇 백 페이지가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편집으로 날려버리고도 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여행을 즐기고 여행기를 나중에 쓰라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여행기를 쓰려고 하는 여행과 여행기를 생각하지 않는 여행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여행기를 쓰려면 작은 정보부터 큰 정보까지 모두 기록해두어야 한다. 사진도 가급적 여러 각도에서 여러 장 찍어두어야 하고, 파일도 가지런히 정리해두어야 한다. 요즘은 이 모든 것이 매우 수월해졌지만, 여행을 하는 7개월 내내 이것들을 관리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여행기를 쓰려면, 여행기를 쓸 수 있는 여행을 해야 한다. 기록하고, 맛보고, 또 기록하고, 돌아다니고, 또 기록하기를 반복해야 여행기를 쓸 수 있다.

여행기를 준비하는 사람에게 이것이 가장 중요한 조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행기를 쓸수 있는 여행을 해야 한다.


2. 솔직하게, 또 솔직하게. 

내가 시중에 나오는 많은 여행기와 '질러 유라시아'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지점이 있다. 시중의 많은 여행기는 여행의 로망을 부각한다. 어느 지방 사람을 만났는데 무지 착하고 순수해서 우리가 얼마나 때묻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는 식의 여행기가 많다. 류시화의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이 대표적이다. 류시화의 눈에 비친 인도인들은 다 어디 있는지 모를 일이다.

'질러 유라시아'에는 여행이 지루하다는 이야기가 꽤 많이 나온다. 여행이 별거 없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질러 유라시아'에 대해서 많은 비평을 받은 것은 아닌데, 비평에서 좋은 이야기를 한 사람들은 꼭 찍어서 그 부분을 좋다고 했다. 여행기 중에서 여행이 '재미없다'고 쓴 여행기는 흔치 않다는 것이다.

어쩌면 여행을 했는데 그 지역 사람들이 순수하더라 하는 많은 이야기들은 이미 다른 작가들이 충분히 써 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행기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자기만의 독특성(originality)일 것이다.

그 힘은 결국 솔직함에서 온다. 나는 '여행이 지루하다'는 표현에서 의외로 독자들의 공감을 얻은 것을 보고 이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작은 여행이라도 꼭 내 자신에게 묻곤 한다.

정말로 내가 이 여행을 느낀 것이 무엇이었나?

최근에도 예산, 홍성, 충주, 서산, 용인 등의 도시에 잠깐씩 짧은 여행을 다녀왔는데, 각각의 느낌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기억하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정말로 내가 이 여행에서 느낀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묻는 습관 때문일지도 모른다.


3. 캐릭터를 부각하라. 

"질러 유라시아"를 쓸 때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다. 내가 좀 더 과감한 사람이었더라면, 나는 여행기를 훨씬 더 잘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원본이 좀 나았던 점도 있었다.

원본에는 내가 여행에서 만난 수많은 캐릭터들의 심리와 갈등, 그리고 로멘스 등이 상당히 구구절절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누구와 누가 어디에서 사귀고, 어떻게 싸웠으며, 나중에 기가 막히게 다시 만나게 되었다든지, 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런 이야기들이 훨씬 이야기를 맛깔나게 해주었고, 아마 그 이야기가 모두 포함되었다면 '질러 유라시아'는 훨씬 흥미로웠을 것이다.

그런데, 여행을 끝낸지 한참이 지난 그 때 당사자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그 여행에서 만난 어떤 커플은 결혼 직전까지 갔다가 비극적으로 헤어지는 일도 있었다.

차마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쓸 수는 없었다.

더 재밌게 쓰기 위해서 캐릭터를 부각시켰으면, 장담하건대 원고는 훨씬 나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름의 윤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그들의 이야기를 편집했고, 편집한 만큼 원고는 더 재미 없어졌다.

장소보다는 캐릭터가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든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장소에 대해서 이태백 아니라 이태백 할아버지가 와서 글을 써도 그건 카메라를 이길 수 없고, 카메라는 현장에서 본 것을 이길 수 없다. 글을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장소가 아닌 사람이다.

사람의 이야기가 주가 되게 하고, 장소는 배경이 되게 하라. 그러면 여행기는 훨씬 흥미진진해질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면 개나 고양이 등 동물의 행동에 포커스를 맞춰 쓰는 것도 흥미로울 수 있다.

4. 독자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를 생각하라. 

여행기가 아니라 거의 모든 글에 해당하는 조언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 여행기 작가들은 독자가 무엇을 아는지 고려하지 않는다. 초보 여행기 작가가 실수하는 것중에 하나는 고유명사를 처음에 잔뜩 써놓는 것이다. 고유명사를 많이 쓰면 글이 재미 없어진다. 참고로 나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좋아하지 않는데, 신들 이름이 너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항상 글은 남이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터키에 대해 쓴다면,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 성당이나 블루모스크에 대해서 쓰기 보다는 케밥에서부터 쓴다. 혹은 이태원에서 많이 파는 쫀득쫀득한 터키아이스크림에 대해서 쓰거나, 2002년 월드컵에서 3, 4위전의 주인공이 터키였다는 사실, 혹은 6.25때 터키사람이 몇 명이 참전했다는 사실 등을 떠올리면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먼저 아는 사실로 독자를 유인해서, 모르는 사실로 데려간다.

어떤 글들은 순서만 바꿔도 훨씬 훌륭해질 수 있다. 글의 순서를 정하는 가장 큰 규칙은 아는 데에서 출발해서 모르는 데로 데려가는 것이다.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독자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아야 한다.

역설적으로 여행기는 자기가 여행한 장소보다는 독자들이 그 여행장소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알아야 잘 쓸 수 있다.



# 일단 오늘의 팁은 여기까지.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쓰겠습니다.
꾸벅.









2015년 5월 2일 토요일

권기봉의 도시산책: 메시지만으로도 살아남을 책이 되기 위하여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6000842997


이 책의 대부분을 나는 전철 안에서, 그리고 사이클머신 위에서 읽었다.

책이라는 물건은 도저히 걸으면서는 읽을 수는 없는데, 대신 기구를 이용하면 이동중에도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매일 회사로 나를 데려다 놓는 출근길 안에서 나는 지하철 바깥을 회상하며 이 책을 읽었다.
지하철 바깥의 세계는 박사논문을 졸업하기 전까지 나의 놀이터였다.

하루는 영등포로, 하루는 이태원으로, 하루는 삼청동으로, 다른 하루는 현충원 뒷길로 산책을 다니며 박사논문을 어떻게 준비할지, 남은 인생은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내 자신 안으로 파고들기 위해서 걸었다.

그러다보니 정작 장소에 대해서 눈을 뜬 것은 나중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걸을 때 내 관심사는 내 내면에 있다. 장소는 그 다음이다.

출근하고 나서 처음으로 새벽 등반길에 올랐다.
30분도 지나지 않아, 나는 이 등반길에서 전혀 흥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운동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러닝머신을 뛰지?'
'예전에 나는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역시 산책이란 한가했던 날의 방증이란 말인가?'

결국 나는 30분도 지나지 않아서 걸음을 돌려 돌아왔다. 그 날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다.

'서울의 일상.그리고.역사를 걷다'는 부제가 달려있는 '권기봉의 도시산책'이라는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물론 작가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이만한 퀄러티의 답사서(?)를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신택리지를 쓴 신정일 선생님, 역사지리학 관점에서 꾸준히 책을 내오고 있는 이현군 박사, 그리고 권기봉 선생님 정도가 떠오른다. '질러 유라시아'를 쓴 김모 선생도 있지만 요즘 글을 안 쓰기 때문에 패쓰.

권기봉 작가는 서울대 지구교육학과 98학번으로 답사여행 분야의 전문가이다. 내가 그를 처음본 것이 TV이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낄지도 모른다. 해외 곳곳을 다니며 그 나라의 간략한 역사와 풍습 등을 멋진 보이스로 설명해주던 그 사람이 '다시 서울을 걷다'와 같은 책을 쓴 것은 더 의외였다.

'다시 서울을 걷다'는 책은 그 근방에 내가 읽었던 책 중에서 드물게 돈이 아깝지 않았던 책이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그 책 서평을 내라고 했을 정도로 믿음이 가는 책이다. 물론 그 나름대로 아프게 꼬집어내야할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나친 역사의식, 정의감, 일관적 프레임 등.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곳에 작가가 데려다 준다는 것만으로도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편안함을 느낀다는 이유만으로 책을 읽지는 않는다. 적절히 책이 예뻐야 하고, 닿는 곳에 있어야 하며, 어느 순간에 저자에 대한 공감을 느껴야 하고, 더 중요한 것은 저자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아야 한다.

이 기준으로 볼 때 '권기봉의 도시산책'을 읽고 나는 다음에 권기봉 선생님이 내는 책도 사서 보기로 했다. 그의 글은 읽을 가치가 있다.

내가, 어쨌든(나는 어쨌든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 이유는 어쨌든은 어쨌든 결과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좋은 대학에서 지리학으로 박사까지 받은 사람인데, 게다가 나도 걷기 여행 만만찮게 해본 사람인데, 이 책에는 내가 몰랐던 보물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건 이 책이 답사로 쓰여진 책으로 가장하고 있지만, 실은 '공부'로 쓰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답사를 해도 '비원'(祕苑)이 일제가 만든 말이 아니라는 사실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건 진득하게 앉아서 사료를 펼치고 읽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저자의 가장 중요한 솜씨는 현대인들이 지루하지 않을만한 적당한 길이로 아티클을 만들어서 읽어내게 한다는 점이다. 단행본 책을 세번째 내는 저자다운 솜씨다. '다시 서울을 걷다'보다 더 아티클의 길이가 더 짧아졌다. 이렇게까지 짧아지니 나처럼 글을 업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약간 심심하다는 느낌을 준다. 평소 읽는 글의 길이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보통 사람들이 글을 읽으면서 점점 지루해하는동안, 나는 점점 긴 글을 읽어야 안 지루해지는 사람으로 변모해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책의 내용이 아닌 소위 수박 겉핥기식 코멘트들을 남겼다. 일단, 내용보다 이 책은 기획이나, 저자의 노력, 그리고 모든 점에서 높은 점수를 보고 싶다는 점을 분명히 전제해둔다. 그런 전제를 놔두고 내용과 콘텐츠로 이 책에 대해서 평가하라면, 아무도 그런 사람은 없지만, 딱 두 문장을 남기고 싶다.

1. 진화했다.
2. 여전히 정의롭다.

진화했다는 문장은 이전의 내 설명만으로도 충분히 독자를 납득시켰다고 본다. 더 현대인들의 구미에 맞게 답답한 지하철 바깥의 세상을 답사뿐만 아니라 공부를 바탕으로 하여 우리에게 전달해주었다는 차원에서 이 책은 진화했다.

그러나 2.는 여전히 불편하다. 저자가 집요하게 파고드는 문제는 결국 일제시대와 독재이다. 그러니까 좀 심하게 말하면 이 책은 답사서를 가장한 정치서라고도 읽힌다. 다루는 것은 공간이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일제시대의 잔혹함, 그리고 그것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위정자의 무능함이라고 읽힌다. 친일 건축가의 작품들을 집요하게 쫓아가서 '우리가 알고 있는 머시기는 친일파 작품이다'라고 폭로하고 싶은 것이다.

이 책은 마지막에 하비식으로 말하자면, '희망의 공간'을 다루면서 끝마치고 있다. 그러나 이 책 자체가 일제와 독재라는 거대한 트라우마가 공간에 어떻게 새겨졌는지에 대한 기록만 잔뜩 들어있다. 아니, 적어도 내 머릿속에는 저자가 그런 작업을 집요하게 펼쳐나갔다는 점만 기억에 남아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직할 것이다.

오히려 짧은 아티클 형식으로 글을 모아둔 것이 저자의 원래 생각을 포장하기 위한 의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저자의 진정성으로 볼 때 그 정도까지 일종의 '꽁수'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결국 시점의 일관성이다.

시점의 일관성으로 인해 1/3이 넘어가는 지점부터 사실, 이 책에 대한 흥미가 급격히 떨어졌다. 다음 나올 내용의 공간은 모르지만, 다음 나올 내용의 논지는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랬다.

논지의 참신성, 시각의 중요성에 대한 집요한 집착, 그리고 새로운 것이 아니면 엄청나게 지루함을 빨리 느끼는 나의 성향 때문일 것이다.

그 성향 때문에 나는 이 책에서 극도의 피로감을 느꼈다. 논지를 알면서도 계속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끝까지 읽지 않으면 끝까지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 논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누가 말할 때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읽어야만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저자는 독자에게 답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분명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정리하자면, 문제의 참신성 측면에서 그 질문들은 '낡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이 말은 '낡은' 문제의식으로 누군가는 끊임없이 공간계획에서 잔소리를 해줘야 한다는 전제를 담고 있다.

# 나가면서

나는 권기봉 선생님과 같은 작가가 더 잘 되기를 바란다. CF에 나와서 돈도 일년에 몇십억씩 벌고, 나중에 권기봉이 되겠다고 하는 후학을 교육시키는 연예기획사 같은 것도 만들었으면 좋겠다. 아무렴 우리나라에 예쁘고 춤 잘추는 사람들이 k-pop 열풍을 만들었듯이 한국발 걷기와 책쓰기 열풍이 전 세계를 강타하지 못하란 법이 어디 있으랴 싶다.

그 와중에서 나는 그의 책이 '새로워졌는지'를 물을 것이다. 나에게 별다른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그의 책을 두 권씩이나 사서 본 독자의 입장에서 드는 생각일 뿐이다. '새로워져야 한다'는 주문은 나 같은 사람의 기대는 확실히 충족시킬 것이다.

어쩌면 또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질러 유라시아 2'를 냈으면 어땠을까? 책으로 먹고 살려면 아무리 못해도 책 10권은 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아직 나도 블로그에 글을 끄적일 정도로 밖에 시장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글쟁이이지만, 그는 분명히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시장에서 어떤 작가를 인정하기 전까지 작가는 진정한 자기 목소리에만 귀기울이기 어려울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서태지가 처음에 '난 알아요'가 아닌 '울트라 맨이야'를 들고 나왔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까?(나는 기가 막힌 사례라고 생각하지만, 누군가는 '도대체 언젯적 얘기야?'라고 할 사람이 대다수인 것인가?)

'권기봉'이 브랜드가 되는 순간 그는 오히려 더욱 그의 메시지에 의해서 평가될 것이다. 지금과 같은 훌륭한 답사연구가라는 수식이 없어지고 메시지만 남아있을때도 그의 책이 살아남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일독을 권하지는 않는다. 일독을 권한다는 것은 심적 부담을 지우는 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읽든 말든 그것은 독자의 자유다. 그러나 구매는 권한다.

끝.


2015년 4월 4일 토요일

어떻게 쓸 것인가?


"유혹하는 글쓰기"(스티븐 ) 보면, 소설을 쓰는 비법들이 나온다.  


하나만 소개하자면, 킹은 주인공들에게 위기를 던져주고, 그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열심히 받아 적는다고 한다.
여기서 포인트는 "받아 적는다". 작가는 주인공들을 오물딱 조물딱 움직여서는 된다. 기본적인 상황이 전제된 이후에 이들은 논리적으로 움직여야만 한다. 작가의 의도가 과도하게 개입하는 순간, 캐릭터들의 움직임은 부자연스러워진다.

이런 조언은 논문을 때도 도움이 된다. 예를 들면, 다문화를 연구하는 많은 연구들이 "우리는 포용정책을 써야 한다"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캐릭터들의 미시적인 움직임들을 관찰하기 보다는 한국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것을 한국인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캐릭터의 움직임을 논리적으로 추적하기보다는 작가가 전지전능한 입장에서 결론을 내리려고 하기 때문에 삐걱거린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좋은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플롯이 없어야 한다는 논리적 결론에 도달한다. 아니나 다를까, 킹은 "플롯은 신경쓰지 말라" 조언한다. 스토리를 논리적으로 따라가다 보면 플롯이 도출되는 것이지, 플롯에 맞는 글을 쓰려다보면 스토리가 부자연스러워진다는 것이다. 개요가 엉망이기 때문에 논문이 별로라는 흔하디 흔한 충고, 과연 사실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요약하자면, 선스토리 후플롯.

2. 비트겐슈타인 좋아하는 지리학자는 많지 않다. 특히 한국에서 비트겐슈타인을 언급하는 지리학자는 거의 보기 힘들다. 외국 지리학자들은 종종 그를 언급하기도 한다.  

브레너의 누더기 자본주의론(variegated captialism) 대한 논문을 읽다가 갑자기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유사성의 개념이 튀어나와서 반가웠던 적이 있다. 예를 들자면, 지역 내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은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지만, 가족이 유사한 것처럼 공통성을 가진다는 뉘앙스였다(기억에서 꺼낸 내용이라 확실치는 않다).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은 화용론(use theory: 언어의 의미는 사용에서 온다) 기반하고 있었다. 그는 언어가 다양하게 사용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가족 유사성 개념을 도입한다

 가장 유명한 예는, "벽돌!" 이라고 했을 이것의 의미는 상황에 따라, "벽돌을 가져오라", "벽돌이 있다", "지금 벽돌이 필요하다" 다양한 의미로 해석된다는 . "벽돌" 의미는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가족이 닮은 것처럼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벽돌이라고 했을 때는 크든 작든 네모낳고 단단한 물체를 상상할 가능성이 동그랗고 빨간 사과를 떠올릴 확률보다는 높을 것이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가족유사성은 자체로서 하나의 사상이라기보다는, 철학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기 위한 보조개념에 불과하다.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지리학자의 인용에 대해서 내가 느낀 감정은 "모욕감"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비트겐슈타인이란 인간 사고 전반에 걸쳐 있는 문제를 제기한 논리적 사고체계라기보다는, 그냥 "가족유사성"이라는 팬시한 개념 하나를 집어넣기 위한 수단인 것처럼 보였다. 어떤 글이든 그런 측면이 있겠지만,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적 기획은 무시된 "가족유사성"이라는 단어만 떠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이런 현실은 "철학적 탐구"에서 그가 추론했던, 맥락없이 단어들이 떠다니면서 헛된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사고와 놀랍게 닮아있다.

아무튼,

 

담론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회의하게 것은 시점이었던 같다. 우리는 상대가 사고한 흔적들을 모조리 쫓아다니면서 , 거짓을 따질 능력이 없다. 우리가 있는 것은, 가능한 불확실한 것들을 배제하고 확실한 것들을 찾아나가는 것뿐이다. 처음부터 불확실하기 때문에 불확실하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과는 논쟁하기 어렵다고 나는 생각한다.